이번에도 뜻깊은 추석을 보낸 분도 있고 힘든 명절을 보낸 분들도 많다고 여긴다. 본인은 사람들이 차례나 제사를 행하는데 있어서 가끔 그 취지나 형식에 대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유학을 공부한 경험으로 혹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회적 보답으로 이런 글을 이곳에 남겨 본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차례와 제사를 유지하고 있는 가정이 대다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몇 년에 걸친 코로나바이러스 펜더믹은 친지들의 모임에게 까지 영향을 미쳐서 지금은 많은 변화가 오고 있다. 그리고 최근 언젠가 부터 형식면에서도 간소화 되고 상을 차리는 규모도 감소 되었지만 아직은 힘들어도 전통을 고수 하려는 사람들도 꽤 많다.
난 우연히 기회가 있어서 유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공자와 관련된 몇몇 책을 배우고 여러번 읽게 되었는데 의외로 차례나 제사에 대한 것이 아주 상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지들과 혹은 가정에서 왜 그런 행사가 있는 가에 대해서는 그 깃든 정신과 예에 대한 원리와 그것의 사회적 작용 등을 느낄 수 있다.
유교의 정신과 원리를 알면 이런 가례에 대한 불분명한 형식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내가 알게 된 유교가 가진 가정행사에 대한 의의를 복잡하고 헷갈리지 않게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해서 이 글에서 누군가 힌트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딱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만 이야기 해 보겠다.
첫째, 가정의 행사가 왜 있는가 하면 예의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가족 구성원의 서열이 있어서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알게 해 준다는 뜻이다. 인간의 행위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구성원과 이루어 지는 서열의 관계에서 사랑, 존중과 겸손 등이 생기는 작용을 이끈다. 또 그러한 서열에서 생기는 좋은 마음이 내가 있는 가까운 곳에서 부터 직장이나 사회로 퍼져간다. 같은 서열에서도 물론 우애 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왜 예가 생겼을까.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문명과 문화가 발전 하기 전인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육체적인 힘으로 서열이 나누어 졌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에 점점 지혜나 지식의 중요성 때문에 그 쪽의 역량도 커져 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주 바뀔 수 있는 변화가 생기지만 사람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서열이다. 부모와 자녀가 바뀌지 않고 형제 자매 지간에도 누군가 죽지 않으면 차녀가 장녀가 되고 막내가 장남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먼저 태어 난 것에 따라서 서열은 아주 분명하고 그 유지도 확실하다. 가정은 변화 보다는 고정되어야 하기에 힘이나 지혜 보다는 태어난 순서를 우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의 시작이고 보수적 사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존적과 사회적으로 변화를 거부하기에는 그 부작용이 있어서 변화를 빨리 수용하는 쪽의 진보사상도 동시에 자연적으로 발생 한 것이다. 보수나 진보는 정치 사설에서 논하기 좋지만 여기서는 가정을 위주로 하기에 다시 이야기를 가정으로 돌려서 정리 하겠다.
둘째, 서열은 어떻게 정하는가? 바로 우선순위는 위에서 아래이고 그 항렬(또는 대)에서는 먼저 태어난 순서이다. 이것을 아주 간명하게 네자로 표현하면 상하좌우이다. 상하는 윗대에서 아랫대, 좌우는 선후로 태어난 순서이다. 그래서 조카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윗대의 나이 어린 삼촌에게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촌과 조카는 분명하게 상하로 나뉘어 져서 그러한 것이다.
바로 이 상하좌우에서 가정에서의 차례제사와 관련된 모든 형식과 격식도 파생된다. 즉 차례나 제사를 받는 조상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제사를 이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제주라고 하는데 예전 우리나라에서 맏이가 제주로 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물론 융통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통 차례나 제사인 경우 맏이인 제주가 몸이 아프거나 출장이나 여행으로 부재하게 되면 차남 혹은 그 항렬의 다른 이가 제주를 해서 그 행사를 이끈다.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맏이가 노부모를 모시고 형제자매도 보살피고 살림살이를 봐주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사대부나 양반의 입장에는 맏이에게 재산을 다 물려줘도 형제자매를 봐주고 당시에는 경제적 부담도 병행되는 제사를 행하기에 그것이 오히려 적절한 방법이었다. 물론 다른 형제가 사회적으로는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도 있지만 가정의 의례로 돌아오면 역시 그 서열 속으로 들어 와서 예의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유교서적에 친지들을 대할 때는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 등에 대해 드러내지 않고 서열에 따른 사랑과 겸손, 그리고 존중만 강조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교는 참 소박한 정신에서 유래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부자를 추구하고 학벌이나 권력을 추구해서 서열도 그렇게 되어가는 세상에서 오히려 높이 있는 숲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시냇물 같은 자연스럽고 소박함이 유교의 정신 이라고 볼 수 있다.
유학의 예는 고정됨과 융통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위에서 말한 서열이 가장 중요해도 형편에 따라서 양보하고 책임을 주거나 그 책임을 안기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위의 항렬에서 모두 사정상 이번 차례나 제사에 제주가 되기 힘들면 아랫대에게 양해를 구해 그 책임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윗대의 부탁을 받거나 양해를 얻지 않고 아랫대에서 제주를 행 한다면 그 가정에는 서열이 파괴되어서 예가 무너지는 원인이 된다. 상하좌우를 알면 이런 실수가 없게 되는데 가끔 그런 실수를 하는 집안도 있다고 보인다. 상하좌우의 도리는 제사를 받는 조상과 가까운 순서로 나열 되어 있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진다. 그 순서는 그 조상이 몇째 자녀나 손주를 더 아꼈다거나 해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나라의 제사문화는 연구하기도, 어떤 결론을 내기도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기도 참 어렵다. 그리고 가정마다 자신들의 방식이 있어서 누구라도 관여할 필요도 없다. 서로가 의견만 동의하면 형식이야 서로가 편한대로 얼마든지 변화를 주어도 무방 하다고 생각 된다. 후손이 기쁘면 그것이 곧 조상이 기뻐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론적으로 서열의 기초인 상하좌우의 이치와 사랑과 존중, 존경과 겸손을 배울 수 있고 현대사회의 성평등 시대에서 여성도 제주가 될 수 있는 좋은 방식이 있다면, 형식은 편리하고 다양화 하더라도 차례와 제사문화를 길이길이 보존하면 분명 미래 인류에게도 유익 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고가: 정재근(의성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