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하가 다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문묘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으로는 국도로부터 밖으로는 주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廟學을 세워서 매년 봄 2월과 가을 8월의 첫 번 째 丁日에 예로써 제사를 지낸다. 聖敎가 천하에 있는 것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운행하는 것과 같다. 여러 군왕이 이것으로써 규범을 삼고, 만세에 이것으로써 사표를 삼는 것이다. 대개 언어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人性의 고유한 것에 뿌리를 박고, 인심의 공통성이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어찌 신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殿下는 문묘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넉넉하게 하고 제기를 정결하게 하여 스승을 존중하는 뜻을 극진하게 하였으니, 이를 적어 둔다.
[예기(月令) 疏에 “정일을 택하는 이유는, 丁壯成就의 뜻을 취한 것으로 공부하는 사람의 藝業이 성취되기를 희망하는 뜻에 서다.” 하였다.]
[출처 및 출전]: 古典飜譯院; 三峰集(13권) 朝鮮經國典(上) 禮典 文廟/(웹)字典 및 辭典
[덧붙임 자료];
(1). 釋奠大祭日을 丁日로 擇한 理由는…
周나라 衛 大夫의 鼎銘에「六月丁亥公假于大廟」라 하여 或丁, 或亥를 擇하는 普遍的 理由도 여기 있으며, [辭海]에「按舊時 以仲春仲秋之上丁日祭奠先賢先師卽沿古釋奠之制也」라 하였으며, [禮記] 月令에「上丁命樂正習舞釋菜」라 하였고, [唐書] 禮樂志에「其中春中秋釋奠于文宣王武成王皆以上丁上戊」라 하여 自古로 丁日을 祭日로 한 禮에 따라 釋奠, 즉 孔夫子의 祭를 丁祭라고 한다. * 禮記 祭統, 魏孔悝之鼎銘曰;「六月丁亥公假于大廟」
또한 日辰에 '丁'이 드는 날이 옛날에는 공휴일이었다. 따라서 관공서의 휴일인 丁日로 택일해서 제례를 거행했던 것이다. 제례에 參祀할 사람 대부분이 벼슬을 하고 있을 것이므로, 공휴일에 지내야 차질 없이 많은 사람이 참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향사례(享祀禮)
상고시대 성현들은 모든 것에 삼가는 마음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재계하는 마음으로 처음을 시작하고 끝을 마무리 하였다. 지금의 초하루는 옛날에는 전부가 길일이었다. 봄과 초하루, 아침은 모두 새로 시작하는 의미이다. 일 년의 제사는 봄과 가을에, 한 달의 제사는 초하루와 보름에, 하루의 제사는 아침과 저녁에 지낸다.
[참고]; 도산서원의 춘⦁추향사례는, 2월과 팔월의 두 번째 정일에 거행한다. 나라의 제사와 겹치거나 뜻밖의 일이 있으면 하순의 정일에 거행하고, 하순에 정일(丁日)이 없으면 해일(亥日)을 쓴다.
성균관과 향교의 석전대제나 각 서원의 향사를 정일(丁日)로 택하는 일진에 정(丁)이 드는 날이 옛날의 공휴일이었기 때문이다. 관리들에게 열흘마다 하루의 휴가를 주어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한 달에 있는 이 세 번의 휴가를 상완(上浣), 중완(中浣), 하완(下浣)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