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는 禮에 대하여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이라고 하였다. 天理之節文은 예의 본질을 말한 것이고, 人事之儀則은 理의 실천을 말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덕성의 함양 곧 居敬과 지식을 실행하는 窮理를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므로 본질의 節文보다는 理를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儀則이 더 강조되었다. 天理는 불변인데 人事는 가변적이므로 시대적 변화를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주자가례는 800여 년 전 중국의 북송시대 사대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行禮이었다. 그러므로 要件이 다른 조선의 상황에 맞게 변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1474년(성종5)에 주자가례와 國俗을 융화시켜 國朝五禮儀를 집성함으로써 國家禮制를 확립시켰다는 것이 학계의 一說이다.
주자가례와 우리 禮家들의 문헌이 서로 다른 부분이 상당수이다. 퇴계의 예학은 주자가례에만 의존하지 않고 고사와 고례를 참고함으로써 (영남학파의) 예학이 개방성과 현실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호학파는 주자가례를 불변의 가치성으로 절대시하여 영남의 예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진단이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예서와 관련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相考해보면 주자가례를 전적으로 맹종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등장하는 말이 ‘실정에 맞게 하였다.’는 것이다. 禮는 時俗이다. 따라서 예는 때에 맞지 않으면 죽은 예(死文)이다. 禮記에도 ‘예는 시를 중히 여기는 것(禮時爲大)’이라 하였다. 따라서 예란 그 형식이 시속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란 무조건적 복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時宜와 합리성을 추구해야 한다. 공자는 2500년 전 사람이나 당시의 時宜를 말하고, 800년 전 주자는 時宜를 외면하지 않았다. 孔子도 예가 본질을 상실하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면서 “예란 사치하기 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喪事는 형식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하는 것(論語(八佾) 禮與其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戚)”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예법이 주자가례에 근거를 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예법이고, 그것도 800년 전의 것이다. 禮不泥古 因時制宜라 하였다. 예는 고례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沙溪선생도 “한낱 옛 법에 집착할 줄만 알고서 오늘의 시의를 헤아리지 못한다.(近思錄釋疑; 徒知滯泥於古法 而不度今時之所宜)”고 우려한 바 있다. 예는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다.[唜]